[야설] 유부녀의 자위 - 26편
형자는 정말 전화도 받지 않았다. 현관문의 번호도 바뀌어 있었다. 집안에 있는것 같은데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서방에게 이것저것 물어볼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요일이 되어서야 형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서방이 있는 시간에 찾아가 벨을 눌렀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오서방
앞에서도 형자는 나에게 말을하지 않았다. 황급히 옷을 입더니 현관을 나가고 있었다. 급하게 형자를 따라 나서고 있었다.
무슨일인지 당황해하는 오서방을 뒤로하고 형자뒤를 따랐다.
형자가 자기차에 올라탔다. 얼른 따라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난폭스러운 출발과 함께 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형자는 아무말
없이 울면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사고라도 날까봐 간이 콩알만해졌다. 형자의 차는 한강 고수부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가한 곳에 차를 세운 형자가 차에서 내렸다. 강가로 가는 형자를 뒤따르고 있었다. 물가에 이른 형자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왜?"
"정말 나 이해 못하겠어?"
"그럼 어떻게 이해를 하니?...이해할 일이 따로 있는거야"
"그렇구나"
"엄마말 들어"
"엄마"
"응?"
"제발 이번 한번만 나 이해해 주면 안돼요?"
"안돼..그럴수없어"
"나 한번만 이해해 줘요...나 정말 간절해요"
"안돼!"
형자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우는딸의 뒷모습에서 몇일전에 보았던 병진씨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쓸쓸함이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형자가 갑자기 앞으로 뛰쳐 나간다. 눈 깜빡 할 사이에 형자의 몸이 강물속에 빠져 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다. 떠내려 가며 물속으로 가라앉는 딸의 모습을 보며 절규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하얀 물거품을 따라가고
있었다.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이 온통 노랗게 물드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그순간을
잊고 싶었던 것 같았다.
눈을떴다. 웅성이는 소리가 병원 같았다. 순간 정신이 번쩍하고 돌아왔다.
"여보세요!...여보세요!...아무도 없어요?!"
간호사가 들어왔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간호사의 팔을 잡으며 매달렸다.
"형자는요?!...내딸 형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환자분 지금 회복중이세요...다행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조금만 늦었어도 정말 위험했었습니다...그러니 아무걱정
마시고 이 주사액 다 들어 갈때까지 누워서 쉬세요"
"전 괜찮아요...이 주사 빨리 빼주세요...얼른요!"
간호사가 링거줄을 제거해 주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형자가 누워있는 병실로 들어갔다. 죽은듯이 누워 눈물을 흘리고
있는 형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형자에게 다가갔다. 형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 형자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사람이 그렇게 좋으니?"
"...."
"엄마 앞에서 목숨을 버릴만큼 그사람을 사랑하니?"
"예"
"...."
"죄송해요.. 엄마"
"이혼은 안된다"
"알았어요"
"나쁜 계집애...흐흑..흑...흐흐흑"
"미안해.. 엄마...흑..흐흑...정말 미안해...흐흑..흑..어쩔수가 없었어요..흐흐흑..흐흑"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 인지 제대로 알 것 같았다. 죽었다가 살아온 딸을 가슴에 안으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우리 모녀는 한참동안 울고 또 울었다. 오서방이 놀라서 병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며 알수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내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래 강물에 다 빠졌어?...큰일날뻔 했잖아"
"미안해요.. 여보...발을 잘못 디뎠어요"
"조심해야지...아픈데는 없어?...장모님은요?"
"괜찮아요"
"나도 괜찮네.. 오서방...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네"
"별일 없다니 천만다행 이예요...많이 놀랐어요"
우리는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사위의 눈치가 보였지만 형자를 두고 내집으로 돌아 갈수가 없었다. 오늘밤
딸의 옆에서 자지 않으면 심한 악몽에 시달릴것 같았다. 눈치빠른 사위가 안방을 우리 모녀에게 내어 주었다. 딸을 품어
안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살아온 내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해줄수 있을것 같았다. 딸의 정인을 인정해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병진씨가 형자를 만나주지 않고 있었다. 울다지쳐 잠깐 잠이들고 다시깨어
울어댔다. 형자는 식음을 전폐하고 눕더니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형자가 몇일 사이에 살이빠져 수척해 져 있었다. 속이상해 미칠것 같았다. 대한민국 요리 명장이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하나있는 외동딸을 굶겨 죽일 지경에 이르렀다. 오서방도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평소에 잘먹던 음식을 아무리 해 바쳐도
형자는 먹지 못했다. 헛구역질을 하는통에 아무것도 먹일수가 없었다.
오서방이 출근하고 집청소를 마쳤다. 형자에게 미음이라도 먹이고 싶어 챙겨들고 들어갔다. 손사레를 치며 음식을 거부했다.
"어쩌려구 그래...몇술만 뜨자"
"싫어 엄마...먹으면 바로 토나올것같아"
"이게 다 무슨 일이다니?...그사람한테 전화는 해봤어?"
"내.. 전화 안받아요"
"그사람도 결심을 굳게 한 모양이구나"
"엄마...나 병진씨 보고싶어"
"에휴...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꼴을 보고사누"
"죄송해요.. 엄마"
"휴우...내가 쫓아가서 그인간 데리고 오마"
"정말?"
"그래 내가 뭔들 못하겠니 하나있는 외동딸이 죽게 생겼는데?"
"엄마가 할 수 있으면 병진씨좀 데려다 주세요"
"내가 끌고라도 올테니까 뭐 좀 먹고 얼른 정신차려 이것아"
"그럴께...언제 데리고 올꺼야?"
"지금 갈꺼야...퇴근하는 그놈 잡아 올꺼야 내가...이제됐니?"
"응.. 고마워.. 엄마"
"에휴.. 정말이지 딸이 아니라 웬수다 웬수"
속없는 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딸의 불륜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연통을 놓을 처지에 몰리고 말았다. 하지만 내팔도
역시 안으로 굽고 있었다. 퇴근무렵 병진씨의 회사 근처에서 형자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직원이 받아 병진씨를
바꾸어 주었다. 마지못해 받는 느낌이 전화음성 에서도 느껴졌다.
"김병진씨 저 형자엄마 김도연입니다...근처에 와 있습니다"
"또.. 그 한정식 집입니까?"
"싫으시면 다른곳에서 만나요"
"어차피 식사도 안할건데 굳이 그곳에서 뵙기가 좀 그러네요....차라리 요란한 호프집이 더 나을것 같습니다만...
아!...죄송합니다...공인이신걸 깜빡했네요"
"배려해 줘서 고마워요...제 차안에서 조용히 만나는건 어떠세요?"
"좋습니다"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차번호 문자로 넣어 드릴께요"
"그러시죠...제 핸드폰 번호는 아시나요?"
"알고있어요...받지를 않아서 사용중인지는 몰라도요"
"죄송합니다...사용하고 있습니다"
병진씨의 직장 건물 뒷편에 차를 주차하고 위치와 차번호를 문자로 보냈다. 가슴이 자꾸만 벌렁거려 편의점에서 팩 소주를
하나 샀다. 차로 돌아와 팩소주를 홀짝거리며 다 마셔 버렸다.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지만 간이 조금 커진 느낌이 뿌듯했다.
용기인지 만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1500원에 이런 느낌을 얻은것이 무척 남는 장사를 한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붉어진 얼굴과 냄새를 없애려고 파우더를 두드리고 껌을 씹었다.
병진씨가 백미러에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한눈에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가 병진씨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그를
기다렸다. 병진씨가 내 앞으로 다가와 서더니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있었다. 같이 몸을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형자와 혼외정사를 즐기는 병진씨를 추궁하려던 첫만남때의 그모습이 아니었다. 병진씨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것
같았다. 선입견 때문인지 병진씨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었다. 자기 손위처남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는 발정난 수컷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두번째 만남에서 나의 선입견은 보잘것 없이 깨지고 있었다. 당당한 사내다움이 풍기는 병진씨가 무척이나 매력적인
남자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형자가 왜 이 사내에게 그토록 흠뻑 빠졌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일찍 오셨습니까?...조금 더 서둘렀어야 하는데...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방금 왔어요"
"우리 차에 타죠...그리고 죄송하지만 운전을 좀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지요"
병진씨에게 운전을 부탁하고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차가 출발하고 있었다. 목적지를 묻는 병진씨에게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막연하게 대답했다. 병진씨는 아무것도 모르는체 아직은 가고싶지 않은 그 강변으로 차를 몰아갔다. 그것도 형자가 빠졌던
바로 그 공원 한적한 곳에 주차를 하고 있었다. 형자와 병진씨가 텔레파시라도 통하고 있는것처럼 느껴져서 조금 놀라웠다.
병진씨가 차에서 내리더니 매점에서 캔커피를 사들고 돌아왔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무거운 침묵속에 빠져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많이 불편하지 않았다. 따듯한 캔커피의 온기를 느끼면서 검은 강물을 보며 몇일동안 들떠있던
감정을 추스렸다.
"저 강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절박함이나 간절함은 무엇일까요?"
"예?...아...아무도 들어주지 않을때 하는 마지막 주장이나 표현이겠죠"
"그럴수도 있겠네요...마지막 주장이나 표현...병진씨는 그런 막막함을 느껴본적 있어요?"
"없습니다...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만난적은 있어요"
"그분들이 여잔가요?"
"여자들 맞아요"
"형자도 그 여자들 중 하나겠군요?"
"그럴수도 있겠네요"
"지난주에 형자가 저 강물에 몸을 던졌었어요"
"예?!...저..정말요?"
"예...나에게 마지막 이해를 구하다 좌절했어요...그리고는 뛰어 들었어요"
"무사한가요?...어떻게 되었나요?...혹시"
"걱정하지 마세요...다행이 다치지는 않았어요"
"다행이네요........휴우"
한참 어린 병진씨의 긴 한숨에 많은뜻이 담겨 있는것 같았다. 형자를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한다는 신념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 애쓰고 있는 남자의 심지가 느껴져서 호감이 갔다.
"우리 형자 다시 거두어 주셔야겠어요"
"다시 거두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형자가 병진씨 없이 하루도 못산다며 떼를쓰고 있어요...형자를 병진씨에게서 억지로 떼어 놓으면 정말 큰 사고가 날것같아
불안해요...그전처럼 우리형자 다시 사랑해 주세요...부탁드려요"
"참.. 편리하시군요"
"죄송합니다...입이 열개라도 뭐라 드릴말씀이 없습니다"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저나 형자씨도 잘한짓은 아니니까요...어차피 살얼음판 같았어요..이기회에 잘못된 감정을 바로잡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나나 형자씨를 위해서요"
"그러면 우리형자 죽어요...제가 경솔했어요...부탁 드릴께요...우리 형자좀 살려주세요"
"제가 할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병진씨 외에는 아무도 할수없는 일이예요...벌써 사흘째 아무것도 못먹고 있습니다"
"형자씨가 식사를 전혀 못하나요?"
"예.. 지금 사람꼴이 말이 아닙니다"
"휴우...형자씨의 말이 그냥 하는소리가 아니었군요"
"제발.. 우리딸 좀 살려주세요"
"내일 점심때쯤 형자씨 집으로 가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병진씨"
"형자씨.. 어머님 오늘 하신일 후회 하실지도 모릅니다"
"알고있어요...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어요....고맙습니다"
"운전하실수 있으세요?"
"예"
"저.. 좀 걷고 싶어서요...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저기...바람쐬고 이리로 오세요....차에서 기다릴께요...여기 택시도 없잖아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저...괜찮으시면...아..아닙니다"
"말씀하세요...하실 말씀이 남은것 같은데"
"실은 저도 좀 답답해서요...방해 되겠죠?...혼자 다녀 오세요"
"같이 가세요"
병진씨가 먼저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거리를 두고 강가를 걸었다. 아주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답답함을
달래었다. 약간 한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몸을 움츠리며 옷깃을 여미었다. 병진씨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병진씨가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갑자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긴 한숨을 딸의남자
몰래 토해내고 있었다. 한강 고수부지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병진씨가 내차를 몰아 형자네 아파트 주차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이보다 성숙함이 느껴지는 병진씨의 매너가 나를 기분좋게 만들어 주었다.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끄고는 나에게
키를 건네주었다.
"택시타고 가겠습니다"
"형자에게 전화 한통만 해주고 가세요...많이 기다리고 있을꺼예요"
"가면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딸의 정부를 배웅하고 딸네 집으로 올라갔다. 형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현관까지 나와서는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딸의 모습을 얼마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웃음 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딸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져 있었다.
"엄마...정말 고마워"
"전화왔었니?"
"응...지금 막 통화했어"
"잘했다...내일 점심때 온다고 했어"
"응.. 알아...정말 고마워 엄마...나 밥 좀 차려줄 수 있어?"
"계집애...그걸 말이라고 하니?....불여우가 따로 없네...이제 밥이 당겨?"
"응...병진씨가 밥 잘 챙겨먹으면 오신댔어"
"그래서 밥 달라고?...줘야지 해다 바쳐야지"
"병진씨가 나랑 통화하면서 울었어요...나 아픈거 싫대요"
"에휴..이 애물단지야"
쇠고기를 잘게 다져서 죽을쑤어 주었다. 배탈이 날까봐 조금만 주었더니 두번이나 더 죽그릇을 비워냈다. 신기하게도 금방
딸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형자는 언제 그랬냐는듯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12시가 넘어서도 밥을 차려 주었더니
한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런 딸의 모습에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사위는 아마것도 모르고 형자의 회복을 좋아하며
기뻐하였다. 일이 잘 되어가고 있는것같은 자신감은 없었지만 일단의 사태는 정리되고 있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듯한 심한
피로감에 죽음같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오서방이 출근했다. 형자가 그때부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를 가라고 채근하며 음식장만을 하고
있었다. 형자를 밀어내고 딸의 정부에게 먹일 음식을 내손으로 장만하기 시작했다. 음식을 만들면서 불쾌하거나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어제 강변을 잠깐 걸었던 딸의 정부가 은근히 기다려지는 내 마음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형자는 더이상
나에게 가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교대로 샤워를 하고 화장을 마쳤다. 딸의 정부를 맞을 준비를 하고있는 내 모습이 형자
앞에서 조금 민망했다. 그것은 형자도 마찬가지인것 같았다.
"너 왜 갑자기 나에게 가라고 하지않니?"
"사실은...혹시라도 병진씨가 무서운 소리 꺼낼까봐 두려워...엄마가 옆에 있어줘"
"병진씨가 그만 만나자고 할까봐 무섭다는 소리야?"
"맞아...혹시라도 병진씨가 그런말 하면 엄마가 병진씨 말려줘"
"내가 그말을 무슨 명분으로 말리니?"
"명분같은것 찾지말고 나를 위해서 한번만 해줘...앞으로 정말 엄마한테 잘할께요"
"조건이 있어...약속하면 해줄께"
"조건이요?....말해보세요...약속할께요"
"후계자수업 열심히 받아...그리고 우리집에서 병진씨 만나...여기서 불안하게 그러지말고"
"후계자 수업은 열심히 받을께요...하지만...병진씨가 엄마집에 가려고 하실까?"
"그건 내가 얘기할께...됐지?"
"알았어요.. 엄마...고마워요"
"정말 고마운가보네...존댓말을 다하고"
"놀리지마.. 엄마"
"에휴...딱한것"
점심시간을 이용해 병진씨가 딸네집으로 찾아왔다. 딸의 정인으로 받아 들이기로 마음먹고 보는 병진씨는 정말 남자 다웠다.
키도크고 인물도 좋은데다가 몸에 배어있는 매너도 수준급 이었다. 한상가득 차려진 식탁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형자의
마른 얼굴을 보며 안타까워 하는 병진씨의 모습이 너무 고마웠다. 식탁에 앉은 병진씨의 식사 시중을 드는 딸의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하게 보였다. 딸의 정인은 나를 조금 어려워 하면서도 형자의 시중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주고 있었다.
"병진씨 얼른 잡수세요...이거랑 이거는 엄마가 직접 만드신거예요...정말 맛있을꺼예요"
"형자씨도 같이 먹어요"
"얼른 먼저 잡수세요...저는 생선찜좀 담아와서 먹을께요...병진씨 생선찜 좋아하시잖아요"
"고마워요...잘 먹을께요"
"예.. 주인...아..아니 병진씨 얼른 잡수세요...식는단 말이예요"
"예...그럼...저 형자씨 어머님이 어른이시니 먼저 수저를 드시죠"
"예?...예...그럴께요 형자말대로 음식 식어요...얼른드세요...저도 먹을께요"
병진씨에게 극존칭을 쓰며 식사시중을 들고있는 딸의 모습이 나를 당황시키고 있었다. 나에게는 식사를 권하지도 않는 그
무심함이 조금 서운했다. 병진씨가 오히려 나를 챙기며 식사를 권해 주어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었다. 병진씨는 음식도 참
맛있고 복스럽게 먹어주었다. 자꾸만 사위처럼 느껴지는 병진씨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오서방이 떠올랐다. 이래 저랬건간에
내 딸이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수 있게 만드는 병진씨가 고마웠다. 아마도 이세상 모든 엄마는 자기딸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내를 예뻐할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병진씨가 점점 예쁘게 보였다. 아니 무척 예뻤다.
식사가 끝나고 거실에 모여 앉았다. 피해주려 했지만 오히려 형자가 나를 자기 둘 사이에 앉혔다. 차를 마시며 서로 어색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병진씨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제가 오늘 여기에 온것은 형자씨와 그동안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입니다"
"벼..병진씨...거기서 멈춰주세요.. 제발"
"병진씨...형자 말대로 멈추어 주세요...어제 말씀 드렸듯이 형자와의 관계 이어가 줘요..엄마인 내가 오죽하면 이런 부탁을
하겠어요...형자도 너무 행복해 하고 옆에서 보아도 우리딸에게 병진씨가 있어줘야 할것같아요...제발 이렇게 부탁하는
저를 봐서라도 형자 다시한번 거두어 주세요..제 부탁 들어주시면 제가 두고두고 보답하면서 살께요.. 병진씨"
"형자씨.. 어머님 지금 하신말씀 정말 진심이세요?
"간절하게 부탁드릴께요...정말 진심입니다"
"나중에 일이 크게 벌어지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형자가 오서방에게 이혼을 당하더라도 이제 어쩔수 없을것같네요...우리형자 많이 사랑해 주세요...불쌍한 아이예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면 제가 뒤집어 쓸께요"
"어..엄마!"
"넌.. 그냥 가만히있어...병진씨 형자옆에 있어 주실꺼죠?"
"그렇게 하겠습니다...저도 형자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고마워요...그리고 한가지만 더 부탁할께요"
"말씀해 보세요"
"여기말고 제 집에서 형자만나 주세요...여기는 아무래도 조금불안한것 같아서요..제가 두사람 편안하게 쉴수있는 공간
만들어 놓을께요...어차피 형자도 후계자 수업때문에 제집에 매일 와야 하거든요...다른뜻은 없으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구요...어떠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여러가지로 마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딸이 병진씨를 너무 사랑해서 벌어진 일인걸요...우리 형자 잘 부탁 드릴께요"
"명심하겠습니다"
형자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예쁘게 차려입고 병진씨와 나서는 형자를 보며 모든것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형자와 병진씨의 방패막이가 될것이라 다짐했다. 내 딸이 정말 행복해하는 모습에 최고의 가치를 두기로 결론내렸다.
진정한 사위가 새로 하나 생긴것으로 마음먹었다. 더이상 미안한 마음속에 떠오르던 오서방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딸과 병진씨를 위해 집수리를 어떻게 해야할지가 제일 큰 고민이 되었다. 갑작스런 고민이 의외로 즐거웠다. 마치 딸아이를
시집 보내는 엄마의 설레임 같은것이 느껴졌다.
이참에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야 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영업중인 한정식 식당인 한국관은 그대로 유지하고 요리 강습을
하는 별채는 공사를 결심했다. 별채 바로뒤 안채가 이번공사의 주인공이 될 것 같았다. 1층은 내가 쓰고 2층을 딸과
병진씨가 마음놓고 쓸수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 인테리어 업체를 방문해야 직성이 풀릴것 같았다.
두사람에게 큰 선물이 될것같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형자엄마 김도연의 의도는 철저하게 빗나가 버렸다.
형자와 나의 불륜을 막아보려 애썼지만 오히려 인정하며 돕는 꼴이 되어버렸다. 형자 엄마를 만나고 형자와 정말 헤어질
생각을 전혀 안한것은 아니었다.
형자가 나와 헤어지려는 마음을 먹는다면 헤어지리라 마음 먹었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형자는 이미 나를 떠나서 살수없는
완전한 나의 여자였다. 자기에게 맡겨 달라는 형자의 말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일임해 버렸다. 결국 형자는 자기 엄마를
이기고 말았다.
형자엄마가 날 다시 찾아왔다. 형자와의 관계를 다시 추궁하러 온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180도 빗나가 버렸다.
형자엄마는 나에게 형자를 다시 거두어 달라며 부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형자가 강물에 뛰어들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형자엄마는 형자와 나의 관계를 인정하겠다며 백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형자를 만나주지
않자 형자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말했다. 형자 어머님을 딸의 아파트에 모셔다 드리고 차에서 내렸다.
"택시타고 가겠습니다"
"형자에게 전화 한통만 해주고 가세요...많이 기다리고 있을꺼예요"
"가면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택시를 기다리며 형자에게 전화해 주었다. 형자는 정말 풀죽은 목소리로 흐느끼며 자기 마음을 내어놓고 있었다. 모든것이
다 내뜻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며 시치미를 떼었다. 두번다시 형자 어머님의 그런 추궁을 안받아도 되게끔 깔끔하게
마무리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주..주인님 너무 보고싶어요...흐흑...우리엄마가 주인님과 제관계 인정해 주셨어요..저 몇일동안 밥도 못먹어요...먹으며
자꾸 토하고..매일 주인님 생각 뿐이라구요..저 버리시는거 아니시죠?..저 버리지 않는다고 약속 하셨잖아요..생각 안나세요?"
"생각나...하지만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잖아...졸지에 불륜남이 되었다고"
"제가 잘못했어요...다시는 이런일 없게할께요 주인님...형자 한번만 더 믿어주세요 제발"
"알았어...우리 내일 얘기하자...대신 지금부터 밥 먹어야해...내일와서 밥 안먹었으면 바로 가버릴꺼야...농담 아니니까 꼭
먹어야해....나 형자 그러고 있으면 속상하단 말야 이바보야"
"주인님 목소리가 왜그래요?...주인님 우세요?...지금 우시는거죠?...흐흑..흐흐흑..흐흑..주인님 말씀대로 할테니까 울지
마세요...형자 가슴이 찢어질것 같아요...당장 먹을께요"
"정말 먹을꺼지?....나 내일 점심시간에 올께...바보같은 계집애"
"먹을께요.. 주인님...흐흑...흑..흐흐흑...먹을께요"
"엄마.. 금방 올라가실꺼야...엄마한테도 잘해...참 좋으신분 같더라"
"알았어요.. 주인님...사랑해요...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주인님"
"나도 너...형자...많이 사랑해"
"흐흐흑...흐흑...흐흐흑...제가 잘못했어요 주인님!"
칼자루가 내 손에 쥐어 졌다고 생각했다. 내일이면 형자와 형자엄마에 관한일은 모두 정리될것 같았다. 일이 예상외로 빨리
마무리 되는것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부터 형자는 정말 평생동안 내여자가 될것만 같았다. 남편이 있는 자기딸의 다른
남자를 인정하는 형자엄마도 대단 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형자를 무척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에 형자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형자의 어머님도 같이 계셨다. 한식 명장다운 상차림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수라같은 상을 받았다. 형자는 마치 왕의 식사를 준비하는 상궁처럼 나를 대접하고 있었다. 형자어머님 앞이라 조금
민망했지만 딸의 현실이 바로 이모습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형자의 시중을 받으며 정말 맛있는 음식들을 배터지게 먹었다.
내 먹는 모습을 힐끗거리시며 형자 어머님도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거실에서 마주앉아 차를 마셨다. 나는 형자와의 관계를 정리하는게 좋겠다고 이야기를 꺼내었다. 형자와 형자엄마가
내 말을 자르며 사정에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못이기는체 형자엄마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었다. 형자엄마는
나에게 다른 부탁이 있다고 어렵게 말을 꺼내었다. 처남이 드나드는 형자의 아파트가 아닌 자기 집에서 형자를 만나달라는
부턱을 하였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형자엄마는 빨리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겠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웃는 형자엄마의
모습에서 형자가 느껴져서 순간 당황했다. 형자가 들으면 싫어 하겠지만 순간순간 형자와 형자엄마가 겹치고 있었다.
형자는 정말 빠르게 회복했다. 내가 알고있는 체중으로 돌아와야 안아 준다는 말에 형자는 먹보가 되었다. 정말 빠른시간에
형자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내 품에 다시 안길수 있었다. 형자엄마의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형자에게 마음에
드는 씽크대며 도배지등을 고르라고 전화가 빗발쳤다. 덩달아 나까지 끌려 다니며 마감재를 골라야 했다.
양재동 끝자락 나즈막한 산 중턱에 자리한 형자엄마의 집터는 굉장했다. 전면에 수백대를 댈수있는 주차장이 있었다.
서울에서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있는 한국관이 주차장 바로 뒤에 자리잡고 있었다. 글로벌 행사의 국빈들을 한꺼번에
접대할만큼 규모있는 식당은 이미 텔레비져을 통해 익숙하다. 백명도 넘을것 같은 직원들이 한국관 내에서 일개미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한식당에 걸맞는 분위기가 고풍스러운 한옥에서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한국관을
지나면 별채라고 부르는 3층짜리 건물이 나타난다. 그곳은 후배를 양성하고 전통요리를 연구하는 곳이라고 하였다.
형자엄마의 사무실과 연구실이 있다고 하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모여든 명장 김도연의 문하생들이 숙식을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자격이 어느정도 검증된 사람만이
그녀의 문하생이 될수 있었다. 이미 언론을 통해서도 아무나 들어갈수 없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고 별채뒤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2층 양옥집이 한 채 있었다. 그곳이 바로 형자엄마가 있는 안채라고 하였다. 그곳은 가족들만 사용하는
철저하게 사적인 생활 공간이었다.
토요일 오전..일찌감치 형자와 만나 양재동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주로 사용하게될 2층공사에 우리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벽을 조금 건드려 넓은 침실과 거실을 확보했다. 주방은 별로 필요가 없었기에 간단한 홈바를 만들었다.
욕실은 전망이 제일좋은 곳에 통유리를 사용해 시공하게 하였다. 커다란 월풀 욕조에 들어가서 앉으면 양재역 주변 야경이
보이는 곳이었다. 최고의 마감재로 시공해놓은 공사사례를 동영상과 사진으로 보며 참고했다. 조명은 업자가 책임지고
최고의 상품으로 달아준다고 약속했다. 마치 신혼집을 꾸미는 신혼부부처럼 행세하는 형자가 참 사랑스러웠다.
"여보...다 해놓으면 정말 예쁠것 같아요"
"맞아...아주 럭셔리한 인테리어가 될것같아...형자가 은근히 안목이 좋아"
"정말요?...나는 오히려 주인님이 참 눈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1층으로 내려가 보자...형자어머님은 안목이 어떠신지 궁금하다"
"알았어요.. 주인님"
"내려가자"
"저기요.. 주인님"
"왜?...뭐 할말있어?"
"부탁이 좀 있어요"
"어려운거야?"
"그럴수도 있는데...제가 생각하기에는 별로 안어려울것 같은 부탁이예요"
"들어줄께...형자가 하는 부탁인데 어려우면 어떻고 쉬우면 어때...뭔데?"
"저랑 둘이 있을때는요...우리엄마 호칭을 좀 바꾸어 주세요"
"형자.. 어머님 호칭을?"
"예...주인님이 형자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쓰시면 웬지 저와 주인님의 거리가 느껴져요"
"그래?...그럼 형자 어머님을 어떻게 부르지?
"제가 주인님에게 여보라는 호칭도 쓰잖아요...거기에 맞게 불러 주세요"
"그..그럼...장모님?...맞아?"
"예...그렇게 불러주시면 제가 주인님의 정말 아내가 된것같아 좋을것 같아요"
"알았어...그게 뭐 어렵다고...그렇게 바꾸어서 부를께"
"고마워요.. 여보"
"귀여워...우리 얼른 1층에 가보자....장모님이 이상한것으로 시공 시키시면 곤란하니까"
"호호호 알았어요...오늘 사위가 장모님 인테리어좀 도와 주세요...안목이 높으시니까요"
"일단 가보자"
우리는 1층으로 내려왔다. 2층보다 넓은 1층은 평소에도 형자 어머님이 생활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넓은방 2개와 거실
그리고 제법 큰 주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원이 보이는 욕실도 넓고 화려해 보였다. 내가 나설것이 별로 없었다. 1층은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진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욕실에서 잔디가 깔려있는 정원으로 바로 나갈수 있는
유리문과 통유리 시공을 제안했다. 형자 어머님은 곧바로 내 의견대로 욕실을 꾸며 달라고 업자에게 통보했다. 업자는
비용이 많이 들겠다고 엄살을 부렸고 형자 어머님은 청구하라고 짧게 말해주었다. 업자일행이 물러났다.